
계절을 건너는 편지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마을 앞산에는 개나리가 피기 시작했고, 논두렁 옆 길가엔 이름 모를 들꽃이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여진은 여전히 매일 학교를 오갔다. 그리고 가끔, 아무도 없는 강둑에 홀로 앉아 있었다. 강희 오빠는 서울에 있었다.며칠에 한 번, 짧은 문자나 편지로 안부를 전해왔다. 전화는 자주 하지 않았다. 아마도, 목소리를 들으면 서로 더 보고 싶어질까 봐. 『여진아. 서울도 이제 조금 익숙해졌어. 아직도 낯선 것들이 많지만, 너랑 함께 걷던 길을 떠올리면 어딘가 든든해져. 너는 요즘 어때?』 여진은 그 편지를 열 번도 넘게 읽었다.그 애의 말투, 그 애의 글씨, 그 모든 것이 그리움으로 변해 마음속 깊이 남았다. 답장을 쓰는 일도 이제 익숙해졌다. 『오빠. 나는 ..

시골 소년 소녀의 첫사랑 이야기편지 속에서 다시 피어난 마음 서울의 겨울은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다.이불 밖 공기는 뺨을 베일 듯 날카로웠고, 창밖 건물들 사이로 스며드는 소음은 어쩐지 낯설고 무뚝뚝했다. 나는 고요한 새벽을 좋아했는데, 이곳의 새벽은 너무 밝았다.달빛도 별빛도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 나는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마을에 있을 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감각.논밭의 바람, 이른 아침의 닭 울음, 그리고 여진이. 여진이.그 애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아직 학교일까, 아니면 혼자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있을까. 문득 가방 속을 뒤적이다가, 노트북 사이에 끼워진 얇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손글씨였다. 익숙한 둥글고 따뜻한 글씨체. 『오빠. ..

기차역에서 보낸 겨울 기차역으로 가는 길, 여진의 손끝이 시렸다.첫눈이 내리기 직전의 공기는 마치 무언가를 예고하듯 차분하고 서늘했다. 강희 오빠는 오늘 서울로 간다.정확히는 ‘떠난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몇 번이고 연습했지만, 여진은 이 작별 인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역 대합실 안, 강희는 여전히 조용한 얼굴로 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표를 쥔 그의 손, 내려앉은 머리카락, 그리고 익숙한 단정한 옷차림.그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낯설게 느껴졌다. “춥지?” 오빠가 물었다.여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괜찮아.” 둘 사이엔 한참 말이 없었다.멀리서 기차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아직 몇 분 남았는데도, 마음은 이미 뭔가를 놓아버린 것처럼 허전했다. “가서… 연락할게.” “응. 기다릴게.” 짧..

그날 이후, 다시 마주한 눈빛 수능이 끝난 뒤, 며칠 동안 강희 오빠의 소식은 없었다.어쩌면 너무 피곤했을 수도 있고, 그만큼 마음의 여유도 없었을지도 모른다.나는 조급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빠가 무사히 시험을 마쳤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오빠는 아무 예고 없이, 평소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여진아.” 단 한 마디.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보고 싶다는 말도, 기다렸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오빠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벅찼다. “시험… 어땠어?” “생각보다, 괜찮았어.” “진짜? 그럼 이제… 조금 여유 생긴 거야?” “응. 그래서 네 얼굴 먼저 보러 왔지.” 말이 끝나자,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

텅 빈자리와 말 없는 응원 아침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 마을 전체가 조용했고, 버스 정류장 앞에는 어른들의 말소리만 낮게 흘렀다.오늘은 수능 날이었다. 강희 오빠가 시험을 보러 읍내로 나가는 날. 나는 이불 속에서 조용히 핸드폰 화면을 켰다. 새벽부터 메시지를 쓰고 지우길 반복했다. ‘오빠, 잘 보고 와.’ 짧은 문장이지만, 마음은 길고 무거웠다. 결국 보내진 메시지는 단 한 줄이었다. 『오늘, 응원해.』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시험 전날엔 핸드폰도 잘 안 보던 사람이었으니까.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엔 여전히 작은 기대가 있었다. ‘혹시 시험 끝나면 바로 연락 오지 않을까?’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희 오빠가 늘 기다려주던 골목을 지날 때 문득 멈춰 섰다.오늘은 그 자리..

가까이 있지만 멀어지는 “나, 서울 가기로 했어.” 강희 오빠의 말은 조용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알고 있었어. 오빠가 수능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서울 대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도.그런데 막상 그 말을 들으니, 가슴 어딘가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언제 가?” “아직 정확하진 않아. 수능 끝나면 바로 올라갈 것 같아.” 오빠는 여전히 담담했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잘 됐다… 정말.”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오빠는 내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걸 알았을까. 그날 이후, 나는 혼자 걷는 연습을 시작했다.오빠가 늘 옆에 있어주던 길을, 혼자 걸어보았다. 처음에는 낯설고 쓸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