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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머무는 자리
장마가 오기 전, 마을은 잠시 더위를 식히는 듯한 바람으로 가득했다. 여진은 비가 오기 전 특유의 눅눅한 공기를 싫어했지만, 오늘은 괜히 그 바람이 반가웠다. 마을 뒷산 작은 오솔길 끝에 자리한 그네 의자에 앉아, 강희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히 이 길로 온다 했는데…”
여진은 손목시계를 흘깃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순간, 산 아래쪽에서 자전거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두근거림을 애써 숨기며 여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 있었네.”
강희였다.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여진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말수는 적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분명했다. 여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건 막지 못했다.
“기다린 거 아니거든.”
강희는 웃음만 지었다. 조용히 그녀 옆에 앉으며 말없이 바람을 느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그렇게, 말없이 바라보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의 감정은 천천히 깊어지고 있었다.
“오빠.”
여진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작고 조심스러웠다.
“내가 말이야…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잘 몰랐는데, 오빠랑 있으면 그게 뭔지 조금 알 것 같아.”
강희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여진의 말을 되새기며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여진은 그 한마디에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울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강희의 진심이 고스란히 가슴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진짜야?”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넌, 그냥 꼬마가 아니야. 나한텐… 많이 특별해.”
바람이 살짝 불었다. 여진의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강희는 조심스럽게 손으로 그것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잠시 마주쳤다. 그 안에는 어떤 서툰 고백보다도 더 진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날 이후, 여진은 매일 그 자리를 찾아갔다. 정해진 약속도 없고, 강희가 매번 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기다릴 이유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강희 역시, 그녀를 기다리게 했다는 사실에 책임처럼, 설렘처럼 그 자리에 향하게 되었다.
어른들은 모르는, 아직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서툰 소년과 소녀의 마음. 그러나 그 순수함만큼은 어떤 말보다도 더 크고 분명하게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시골 소년 소녀의 첫사랑 이야기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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