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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번져오는 감정
그날 밤,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가방 안쪽에 조심스레 꽂혀 있던 그 편지. 여진이가 쓴, 작은 손글씨가 담긴 종이를 몇 번이고 펼쳐 읽었다.
‘오빠. 나는 이제 오빠가 그냥 오빠가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빠야.’
그 문장 하나하나가 마치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부끄럽고 서툰 고백이었지만, 그 안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따뜻해졌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진심으로 바라봐준 건. 말없이 나를 좋아해 온 그 애의 시간이, 문장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겁이 났다. 여진이는 아직 고등학교 1학년. 내게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고, 서울 대학 진학도 눈앞에 있었다. 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애는 이제 막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의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현실은 점점 갈라지고 있었다.
다음 날, 여진과 마주쳤을 때 나는 예전처럼 웃어보이려 애썼다.
“오늘도 아침 일찍 나왔네.”
“응. 그냥 걷고 싶었어.”
짧은 인사였지만, 우린 서로의 표정에서 많은 걸 느꼈다. 여진은 평소보다 조금 더 눈을 맞추려 했고, 나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애의 고백이 우리 사이를 바꾸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난 뒤, 강둑길을 혼자 걸었다. 시골의 바람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내 마음은 무겁고 조용했다. 나는 무언가를 붙잡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흔들렸다.
‘나는 지금 뭘 해야 하지?’
편지를 써보기도 했다. 여진에게 고맙다고,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적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 편지는 다음 날 찢어졌다. 내 진심이 그 애에게 짐이 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며칠 후, 여진은 매점에서 사온 작은 간식을 내밀었다.
“오빠 이거 좋아하잖아. 오늘 진짜 빨리 나가서 겨우 샀어.”
“고마워.”
그 한마디조차 목 끝에서 간신히 나왔다. 여진의 사소한 배려에 마음이 아리게 저려왔다.
나는 바보처럼,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애가 웃으면 같이 웃고, 말없이 걷는 길을 함께 걸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또 혼자 편지를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일을 반복했다.
“강희야. 너 요즘 왜 그래?”
친구 하나가 물었다. 내가 예전보다 조용해졌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냥… 생각이 많아서.”
내 대답은 늘 그렇듯 모호했다. 아무도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그렇게 철저히 감췄다. 여진조차도 몰랐다.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갈등하고 있다는 걸.
가끔은 상상했다. 수능이 끝나고, 내가 서울로 떠난 후의 날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세상을 배우겠지. 그리고 여진은, 여전히 이곳에서 나를 기다려줄까?
아니, 기다리지 않기를 바랐다. 기다리게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바람과는 다르게, 마음은 이미 그 애에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여진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던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그 애의 곁을 지킨다.
조금은 멀어져야 할지도 모르는 그 마음을, 조용히 껴안은 채로.
(다음 화에 계속)